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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s mission'하나님의 나라 목회'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하나님의 나라 목회'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그래서 목회는 하나님나라를 위한 목회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 목회가 되어야 하는데
교회의 목회가되었다는 말을 납득할 수 있을까? 교회는 예수께서 지상에서 시작하신 하나님나라 증언과 증거,
즉 하나님나라 선교를 계승하기 위해 이 땅에 존재하는 법이다.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선교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점이 여기서 중요하다. 하나님나라를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볼 수 없다. 예수께서 교회를 설정하신 목적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그 존재 이유에 맞게 합목적적으로
교회는 하나님나라를 전하고 경험하면서 살아가도록 목회를 계획하고 진행해야겠지만, 자칫 목회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가운데 이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교회 구성원이나 교회 자체(단체)의
이기적 욕구를 충족하는 일에 만족할 수도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고 싶은 것은 교회를 위한 일이 곧 하나님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보는 너무 단순한 견해다. 교회는 하나님나라에 집중하지 않을 때에 참다운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며, 그때에 교회가 하는 일은 하나님나라와 상관없는 교회 자신의 일이 될 것이다. 교회가 하는 일이 어떻게 하나님나라와 상관없는 일이 될 수가 있냐는 물음이 바로 우리가 경계하는 단순한 견해이다. 설교를 하거나 예배를 드리거나 심방을 하거나 교제를 하거나 봉사를 하는 것 그리고 성경공부 시간을 갖고 주일학교를 운영하는 교회의 일들이 무조건 하나님나라 선교가 될 수 없다. 설교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설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나라를 소개하고 드러내고 소망하게 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심과 더불어 이 세상에도 하나님나라가 시작되었고, 그가 성령을 보내심으로 교회가 하나님나라를 증거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완성된 하나님나라를 그가 다시 가지고 오실 때까지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공동체로서의 사명을 다할 것을 설교해야 하는 것이다.

가나안성도가 알아야 하는 교회, 하나님나라의 '공동체'
우리는 2019년 현재 한국 개신교인 일천만 중에 이백만이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은 가지고 있지만 교회에는 출석하지 않는 소위 '가나안성도'의
존재를 통계자료를 통해서 알고 있다. 이렇게 증가하고 있는 교회 안 나가는 교인들을 시대의 경향으로 이해하자는 제안도 있으나, 교회가 단지
설교를 듣는 곳이거나 종교인의 소속을 밝혀주는 기관이라서가 아니라,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례를 통해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새로운 신앙 유형이라고 인정하기에는 그 전에 기독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즉 기독교 신앙의 형성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세례는 뭇 성도들과의 연합이며,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는 그 몸인 교회를 이루는 지체로서의
개인은 세례 이후 계속해서 반복되는 성찬예식을 통해서 한 몸을 이루는 신앙생활을 확인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소속되어서도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로 빠져들기 쉬운 개별화되어가는 생활 가운데에 있는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 혼자 신앙생활을 영위한다는 것은 무슨 말인지 생각해 보자. 먼저 믿음을 유지하며 기도할 것이다. 홀로 찬송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말씀을 묵상하고 주석서도 참고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는 혼자서 할 수 없는 노릇이다. 무인도에서도 신앙생활이 가능하겠지만 교회를 등진 신앙생활은 성립되기 어렵다. 하나님나라를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인데 그 복음을 누려야 할 공동체를 외면한 혼자만의 신앙생활은 하나님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채 하나님나라를 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소위 '가나안성도'를 하나의 신앙유형으로 인정하기 보다는 왜 가나안성도가 증가하는지, 교회는 어떻게 해야 가나안성도가 줄어들게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는 '세상사 참여'와 '교회 일치'의 두 영역 실천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하나님의 선교는 두 영역에서 수행된다. 그 하나는 하나님이 세상에 육신으로 오신(요3:16) 사건을 근거로 하는 세상에 대한 긍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저희 믿는 자들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하게 만들기 원하신 예수의 대제사장적 선교기도(요17:21)를 근거로 하는 교회의 일치 영역이다. 우선, 세상에 대한 긍정은 교회중심에 대한 도전인 동시에 세상사 가운데 섭리하시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을 의욕적으로 바라보고 기대하는 것이다. 교회는 "이 세상의 많은 단체들 중에서 자신의 회원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유일한 단체"로서 교회의 일상은 교회 자신의 사안에만 너무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해서(교회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에 주목해서 세상을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관심에 부응하여 세상을 사랑하는 관심에 집중해야 할 것이다.

세상이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교회가 하는 일들 중의 하나로서 선교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선교를 하기 위해서 교회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를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선택할 자격이 없고 다만 교회일 것이냐 말 것이냐, 즉 선교를 하지 않으면 교회일 수 없다는 요점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칼 바르트(K. Barth)는 그의 저서 『교회교의학』에서 '교회는 세상을 아주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위 책 72장에 해당하는 '성령과 교회공동체의 파송' 부분에서 교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안들을 늘 잘 알고 숙고해야 할 것을 말한다(KD Vol. 29, S. 784). 교회는 세계사 속에 자리 잡고 있고, 이 세계와의 지속적인 관계성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참여가 아니고서는 부름 받고, 세움 받고, 파송 받은 교회가 달리 존재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사에 둘러싸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세상사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읽어내고 교회가 자신에게 위임된 예언자적 증언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그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크냐 하는 생각이 번져 나갔다"(눅9:46)는 말은 성도의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위험이 목전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이에 대비하는 길은 첫 순간부터 이 원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것을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다. 자기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연인의 싸움이다. 본회퍼는 우리의 악한 생각을 가장 잘 정복하는 길은 흔히 그 생각을 전혀 말로 표현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를 옳다고 주장하는 마음은 은혜에서 솟아나는 마음으로만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대신 남을 심판하는 모든 생각은 말로 표현되지 않도록 막으면 저절로 억눌려 질식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사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생의 성패를 가늠하는 규칙은 서로 형제에 대해서 할 말을 가슴에 지닌 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이천년의 그리스도교 역사는 하나님의 선교를 진행하는 일에 있어서 그 시대를 살아간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낸 각 시대의 특색과 각 장소의 특색을 가지고 풍성한 선교를 체험했다(골1:27). 로마가톨릭교회의 사도신경을 신앙의 근본으로서 고백하고, 동방정교회가 수호해온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 인성 그리고 하나님의 삼위일체 되심을 믿음의 뿌리로 삼은 개신교회는 결코 개신교회의 역사를 루터의 신앙운동 이후부터 계산하는 지난 오백년만을 개신교회의 유산이라고 주장하거나 로마-가톨릭교회나 동방정교회를 동일한 신앙이 아니라고 주장할 자유가 없다. 동일한 성씨와 돌림자를 사용하고 있는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나와 동일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나의 가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로마-가톨릭교회가 마리아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사실과 동방정교회가 성화 자체를 숭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개신교는 인정해야 한다.

이범성 교수 ecumen@gspt.ac.kr